입속의 검은 잎
또 어떤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안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의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데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것인가.
-오래된 서적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수 없는
이유는 생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포도밭 묘지2中
내 얼굴이 한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메이는
가지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있는
단단한 몸통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갖혔네
-빈집
네 속을 열면 몇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때마다 또다른 모습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울고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있어, 네 속을 열면.
-밤눈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왔다
살아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수 없는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나리 나리 개나리
내 유년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의 무릎에 뉘고 무딘 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한다. 자정지나 앞마당에 은빛금속처럼 서리가 깔릴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하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가득 풀풀 수십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 겨울판화
잃어버린것들은 찾지 않네. 그럴만큼 시간은 여유가 없어.
잃어버려야할것들을 점검중이지, 그럴만큼의 시간만 있으니까.
아무리 조그만 나프탈렌처럼 조직의 서랍속에 숨어있어도
언제나 나는 자네를 믿어왔어, 믿어주게.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방죽에서 나는 한참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깍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 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에요.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우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지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선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바라기 씨앗 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서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
-위험한 가계